원문 : 최재서, 「『천변풍경』과 『날개』에 관하야」, 『문학과 지성』, 인문사, 1938.
위의 글에서 일부 문장이나 단어를 현대어로 약간 수정했다.(예:캐메라->카메라) 오탈자가 있을 수도 있음ㅋ
『천변풍경』과 『날개』에 관하여
최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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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풍경』은 『조광』 8, 9, 10월호에 연재된 박태원의 중편소설이고 『날개』는 역시 『조광』 9월호에 발표된 이상의 단편소설이다. 두 작품이 다 항간에 흔히 보는 즉흥적 창작이 아니라 오랫동안 작자의 손때를 올린 듯싶은 작품일뿐더러 작자들은 어느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붓을 든 듯싶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는 어느 정도까지 작품 위에 실현되어있음을 기뻐한다.
이 두 작품은 그 취재(取材)에 있어 판이하다. 『천변풍경』은 도회의 일각에 움직이고 있는 세태인정을 그렸고 『날개』는 고도로 지식화한 소피스트의 주관세계를 그렸다. 그러나 관찰의 태도와 및 묘사의 수법에 있어서 이 두 작품은 공통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즉 그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주관을 떠나서 대상을 보려고 하였다. 그 결과는 박 씨는 객관적 태도로써 객관을 보았고 이 씨는 객관적 태도로써 주관을 보았다. 이것은 현대세계문학의 이대경향-리얼리즘의 확대와 리얼리즘의 심화를 어느 정도까지 대표하는 것이니 우리에게 대단히 흥미있는 문제를 제공한다.
박 씨는 객관을 객관적으로 보고 이 씨는 주관을 객관적으로 보았다는 말은 독자에 기이한 감을 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자연현상을 감상적으로밖에 볼 줄 모르는 이류시인이 있는 것과 동시에 자기자신의 심리작용을 과학적으로(물론 상대적인 말이지만) 관찰할 수 있는 심리학자가 있음을 생각하면 이 말은 결코 일편의 궤변이 아님을 알 것이다. 어떠한 특수한 필요이외에 주관세계와 객관세계의 구별을 말살함은 문예비평에 있어서 위험한 짓이다. 그러나 작가가 주관세계를 재료로 쓰면 주관적이고 객관세계를 취급하면 객관적이라는 소박한 논법을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폐기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고 객관적 재료를 쓰는 작가는 다만 그 한 가지 이유로써 주관적 재료를 쓰는 작가보다 월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현대의 경향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소박한 논리적 편견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가 예술가인 이상 그에게 있어 주관세계와 객관세계 사이에 가치의 우열은 없을 것이다. 다만 작가의 유전(遺傳)이라든가 교양의 힘에 지배되어 한 작가가 똑같은 친밀성을 가지고 두 세계에 다 같이 접근할 수 없는 사실만은 어찌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분석학자가 말하는 ‘심리적 타입’을 문예비평에 응용할 필요를 느낀다. 인간의 예지(叡智)는 세 가지 타입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한다. 행동의 동기가 늘 외부에서 오는 사람, 그것을 ‘외향적 타입’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와 반대로 그 동기가 늘 내부에서 오는 사람을 ‘내향적 타입’이라고 한다. 이 두 타입은 말하자면 극단한 예이니 그 중간에 내외 어디로서나 오는 중간 타입이 있다. 이것은 수로 보아 최대하나 그 생활형태가 평범하여서 우리의 흥미를 끌지 않는다. 외향적 정신은 늘 외계를 향하여 움직이고 또 객관물 사이에 있을 때만 산 듯싶다. 그와 반대로 내향적 정신은 늘 자기자신의 내부세계를 성찰하기를 즐겨하고 또 내부세계에 있어서만 안정과 쾌감을 느낀다. 우리는 예술가에 향하여 이 두 세계 중 어느 하나를 취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예술가는 선천적으로 그 정신이 지향되어 있고 또 그의 예술의 동기는 이 지향 가운데에서만 생겨나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술가에 향하여 성실을 요구할 자격은 있다. 외부세계거나 내부세계거나 그것을 진실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라고. 이것은 즉 예술가에 대하여 객관적 태도와 리얼리즘을 요구하는 데에 벗어나지 않는다. 예술의 리얼리티는 외부세계 혹은 내부세계에만 한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것이나 객관적 태도로써 관찰하는 데 리얼리티는 생겨난다.
문제는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눈에 있다. 주관의 막을 가린 눈을 가지고 보느냐 아무 막도 없는 맑은 눈을 가지고 보느냐 하는 데서 예술의 성격은 규정된다. ‘막을 가리지 않은 맑은 눈’이란 말에 논쟁은 집중될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의 카메라의 존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적지 않은 서광을 던져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눈이 카메라와 마찬가지의 기능을 발휘치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대로 카메라적 존재가 되려고 하는 노력과 및 그 노력이 어느 정도까지 성공한 실례를 우리는 현대문학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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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카메라적 기능에 있어서 카메라를 따르지 못하니 그 반면에 카메라가 가질 수 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소설가는 카메라인 동시에 이 카메라를 조종하는 감독자일 수 있다. 소설가는 카메라적 활동에 있어 거지반 완전히 개인적 편차를 초월할 수 있으나 그 감독자적 활동에 있어선 주관의 습관성을 떠날 수 없고 또 떠날 필요도 없다. 카메라를 어떠한 장면으로 향하고 또 어떤 질서를 가지고 이동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개성이 결정할 것이고 또 그 결정이 개성에 의거하였다는 데에 예술의 존엄성과 가치가 있다.
소설가는 이 카메라를 가지고 자신의 심리적 타입에 따라 외부세계로 향할 수도 있고 또 자기자신의 내면적 세계로 향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 사태는 비교적 단순하나 후자의 경우에 있어선 대단히 미묘하다. 그것은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관계가 동일인 내에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자기의 생활과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토로하는 신변소설가라든가 자서전적 시인의 경우이면 별로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날개』의 작자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 내부에 관찰하는 예술가와 관찰당하는 인간(생활자로서의)을 어느 정도까지 구별하여 자기내부의 인간을 예술가의 입장으로부터 관찰하고 분석한다는 것은 병적일는지 모르나 인간예지(叡智)가 아직까지 도달한 최고봉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자의식의 발달-의식의 분열 전제로 하는 것이니 물론 건강한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의식의 분열이 현대인의 스테이터스(현상)이라면 성실한 예술가로서 할 일은 그 분열 상태를 정직하게 표현할 일일 것이다. 마치 외향적 타입의 작가가 카메라를 가지고 외부세계를 촬영하듯이 그는 자기의 카메라로 자기자신의 내면세계를 촬영하여야 할 것이다. 그 때에 그의 카메라 위에 주관의 막이 가려져서는 아무 가치도 없다. 예술재료로서의 생활감정과 그 감정을 취급하는 예술가의 센티멘트는 판이한 물건이다. 과학자와 같이 냉엄한 태도를 가지고 자기자신의 생활감정을 다룰 줄 모른다면 그는 차라리 그 재료를 버림이 옳을 것이다. 이리하여 외부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카메라적 정신을 가지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나 자기의 내면세계를 그리는 데에 그 정신을 가진다는 것은 곤란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잔인한 일일 것이다. 박 씨가 혼란한 도회의 일각을 저만큼 선명하게 묘사한 데 대에서도 존경하지만 더욱이 이 씨가 분쇄된 개성의 파편을 저만큼 질서있게 카메라 안에 집어넣었다는 데 대해선 경복(敬服)치 않을 수 없다.
『천변풍경』이 우리에게 주는 흥미는 흘러가는 스토리나 혹은 작자자신의 다채한 개성이 주는 흥미는 아니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작자를 의식한다면 그것은 실로 부재의식뿐이다. 즉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자를 의식치 않는다. 작자의 위치는 이 작품 안에 있지 않고 그 밖에 있다. 그는 자기의사에 응하여 어떤 가작적(假作的) 스토리를 따라가며 인물을 조종치 않고 그 대신 인물이 움직이는 대로 그의 카메라를 회전 내지 이동하였다. 물론 그 카메라란 문학적 카메라-소설가의 눈이다. 박 씨는 그의 눈 렌즈 위에 주관의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였다. 그 결과는 우리 문단에서 드물게 보는 선명하고 다각적인 도회묘사로서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을 읽은 사람이면 이 방법에 있어서의 작자의 성공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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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천변풍경』에 있어서 카메라를 지휘하는 감독적 기능에도 마찬가지 정도로 성공을 보여주지 못하였음을 섭섭하게 생각한다. 박 씨의 카메라는 그가 향한 곳을 잘 촬영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박 씨는 자기의 카메라를 어디로 향할까, 그리고 장면연계에 어떠한 의도를 줄까? 이런 점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할 여지는 없었을까? 영화감독에 영화기술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함이 진리라면 소설가에 소설기술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함은 더욱 진리일 것이다. 기술 이상의 그 무엇이란 결국 묘사의 모든 디테일(세부)을 관통하고 있는 통일적 의식-그것은 사회에 대한 경제적 비판일는지도 모르고 또 인생에 대한 논리관일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독자가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닌 후 그 의식에 남겨지는 통일감이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천변풍경』에 다소의 의혹을 품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의 전체적 구성을 말하기 전에 그 부분부분에 나타난 작가의 수법을 좀 더 자세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작자의 카메라는 우선 청계천 빨래터로 향해진다. 이것은 어멈과 행랑살이류의 여인들이 그들의 왕성한 다변욕을 발산시키고 또 부근일대의 생활내막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는 일종의 사교장이다. 거기선 “아아니 요새 웬 비옷이 그리 빗싸우?” 하는 적은 생활의 탄성도 들리고 사회조류에 밀려 몰락해가는 신전주인에 대한 책임없는 비평도 들린다. 가장 서울의 색채가 농후한 이 천변에 여인군이 빚어내는 생활의 비애와 유머의 리듬은 그들의 아름다운 애사(哀辭)와 함께 흐르고 있다. 작자는 어딘가 단정히 앉아 그들의 동작과 회화를 주밀히 관찰하였고 또 그것을 아무 편견없이 표현하였다. 대단히 구미(口味) 도는 일절(一節)이다.
다음 장면은 ‘이발소’로 이동된다. 빨래터가 여인들의 뉴스 교환소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은 남자들의 생활감정의 정산소이다. 이곳에선 거울에 비치는 노쇠한 얼굴을 보고 젊은 첩을 연상하여 민 주사가 우울에 빠진다. 작자의 서치라이트는 표면의 행동을 뚫고 들어가서 이 노신사의 컴컴한 내부세계를 비춰준다. 여기서 작자의 카메라는 활동을 휴지하고 그 대신 이발소 소년의 카메라가 회전을 시작한다. 이 소년이야말로 이 작품의 최대걸작이다. 이 소년은 이 작품의 인물인 동시에 또 관찰자이다. 그는 왕성한 호기심과 아무 편견도 없는 맑은 눈을 가지고 이발소 창 밖에 유동하는 생활을 모조리 관찰하고 또 소년다운 순진한 마음과 귀여운 유머를 가지고 소년다운 비평을 내린다. 작자자신을 연상시키는 자미풍부(滋味豊富)한 소년이다. 따라서 이 소년의 카메라는 작자자신의 카메라와 구별할 필요가 없다. 작자는 이후에도 가끔 이 소년의 눈을 빌려 실재의 단면을 포착하기에 노력하였다.
『천변풍경』의 제1회에 있어 비교적 표면생활을 부감(俯瞰)한데 비하여 제2회에 와선 인간생활에 깊이 들어가 그 감정의 파동을 추구하기에 노력하였다. 「시골서 온 소년」은 도회생활이 가지고 있는 고독과 회의와 절망을 외로운 소년의 생활을 통하여 잘 표현하였다. 이발소년이 지적이고 적극적인데 비하여 이 소년은 감성적이고 소극적인 일면을 대표하였다. 이것도 역시 작자의 일면을 구상화함인가? 차문(借問)한다. 도회생활의 페이소스와 유머는 「불행한 여인」 「경사」 「몰락」 「민 주사의 우울」 등의 테마를 쫓아 음악 같이 흘러간다. 작자의 카메라는 전회와 마찬가지로 소년의 내부 행랑방 민 주사의 첩가 등으로 신속하게 이동한다. 그 중에도 「경사」의 일절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디킨스를 연상한다. 제3회에 가서도 전회와 같은 수법을 가지고 부회의원선거에 몰두하는 일군과 우울한 민 주사와 돈없는 사람들의 고독과 비참, 카페를 중심으로 한 애욕취인(愛慾取引)의 자태 등을 묘사하였다.
이 모든 장면을 통하여 작자는 종시여일(終始如一)하게 카메라적 존재를 견지하였다. 서로 부딪치지 않을 정도로 현실에 접근하여가며 그 동태를 될 수 있는 데까지 다각적으로 묘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즉 이 작품의 세계가 된 천변은 그 자신일개의 독립한-혹은 밀봉된 세계가 아니냐하는 의문이다. 물론 천변과 외부와의 연관은 있다. 실례를 든다면 신전주인의 몰락이라든가 포목상주인의 선거운동이라든가 기타 두세 곳에 있어 외부사회와의 교섭을 암시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암시 내지 묘사에 불과한 것이고 작자가 처음부터 그런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물론 카메라의 기능으로선 도저히 기도치 못할 일이다.그 배후에 살아있는 작자자신의 의식의 문제이다. 작자가 만일에(일례를 든다면) 꼬을즈위-지와 같은 의식과 견해를 가졌다면 그는 전체적 구성에 있어 이 좁다란 세계를 누르고 또 끌고나가는 커다란 사회의 힘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작자후기」에 의하면 이 작품은 그가 계획하고 있는 장편의 일부라 한다. 속(續)천변풍경에 있어 이 사회적 연관의식이 좀 더 견밀(堅密)해지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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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전에 김기림의 『기상도』에서 알 수 없는 시를 보았고 이번 이상의 『날개』에 있어 알 수 없는 소설을 만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하여튼 우리 문단에 주지적 경향이 결실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될 줄로 믿는다. 그리고 이 경향은 독자의 곤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연히 환영해야할 경향이다.
“육신이 흐느적 흐느적 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이것이 두서(頭書)에서 작자자신이 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육체와 정신, 생활과 의식, 상식과 예지, 다리와 날개가 상극하고 투쟁하는 현대인의 한 타입을 본다. 정신이 육체를 초화(焦火)하고 의식이 생활을 압도하고 예지가 상식을 극복하고 날개가 다리를 휩쓸고 나갈 때에 이상의 예술은 탄생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보통소설이 끝나는 곳, 즉 생활과 행동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예술의 세계는 생활과 행동이후에 오는 순의식의 세계이다. 이것이 과연 예술의 재료가 될까? 전통적 관념으로써 본다면 이것이 예술의 세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개인의 의식(그것이 병적일망정)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것을 예술행동으로부터 거부할 아무런 이유도 우리는 가지지 않았다. 더욱이 그 개성이 현대정신의 정세를 대표 내지 예표(豫表)할 때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날개』에 나타난 개성이란 어떠한 것이냐? 우리는 이 소설이전에 소원(遡源)하여 이 소설의 ‘나’라는 주인공을 가장 통속적으로 기술해보자.
그는 ‘그냥 그날을 그저 까닭없이 펀둥 펀둥 게을로고만 있으면 만사가 그만인’ 생활무능력자이다. 그는 완전히 자기 아내에 의지하여 사는 기생식물적 존재이다. 그러나 그의 무능력은 다만 경제생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본능생활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는 과연 그의 아내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사랑이 아니라 주인에 대한 개의 외복(畏服)이다. 그는 아내의 체취를 상상만 하고도 몸을 비비꼬나 그러나 한번 그를 정복하여보려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또 그는 일상생활적 수준에서 사람과 교제할 줄을 모른다. 그는 그의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안에서 밤이나 낮이나 누워 외계와의 접촉을 두절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보통인간의 생활감정에서조차 무능하다. 옆방에서 자기 아내(그는 아마도 카페 여급이 아니면 기생일 것이다.)와 내객이 서로 뒹굴고 농담을 해도 질투심을 느낄 줄을 모른다.
이렇게 무능력자이면서도 그의 신경과 감수성은 면도 같이 예리하다. 그는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서 화장대 위에 늘어놓은 화장품병들과 유희한다. “그것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매력적이다. 나는 그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가만히 마개를 빼고 병구멍을 내 코에 갓다대이고 숨죽이듯이 가벼운 호흡을 하야본다. 이국적인 센쥬알한 향기가 폐로 슴여들면 나는 제절로 스르르 감기는 내 눈을 늣긴다.” 또는 돋보기 장난도 그의 병적인 신경상태를 말한다. “평행광선을 굴절시켜서 한 초점에 모아갖이고 초점이 따근따근하야지다가 마즈막에는 조희를 끄슬르기 시작하고 가느다란 연기를 내이면서 드디여 구녕을 둟어놋는 데까지 이르는 고 얼마 안 되는 동안의 초조한맛이 죽고 싶흘 만치 재미있었다.”
이 남자를 의사가 진찰한다면 뭐라고나 적당한 병명을 붙여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전의 패배자라고 기술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에 그가 여기서 그쳤다면 이상의 예술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배반하고 나온 현실을 의식 안에서 다시금 저작(詛嚼)하는 과정이 없었더라면 그는 영원히 구(救)치못할 패배아였을 것이다. 패배를 당하고 난 현실에 대한 분노-이것이 즉 이상의 예술의 실질이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분노를 그는 현실에 대한 모독으로써 해소시키려했다. 이 현실모독은 어떠한 형식을 가지고 나타났는가?
그는 풍자 위트 야유 기소(譏笑) 과장 패러독스 자조 모든 지적 수단을 가지고 가족생활과 금전과 성과 상식과 안일에 대한 모독을 감행하였다. 주인공과 그의 아내와의 생활은 결코 정상한 의미의 부부생활이 아니다. 다만 아내가 폭군이고 남편이 비겁할 뿐만은 아니다. 도저히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모든 삽화를 통하여 아내의 권력은 확대되고 남편의 지위는 희화화되어 부부생활의 가치전도를 실행했다.
이것은 가족생활-더욱이 동방예의지국의 그것에 대하여 모독이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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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남편을 옆방에다 두고 딴 남자와 만나기 위하여 그때마다 돈을 머리맡 벙어리에다 넣어준다. 그러나 “그것은 고것이 내 손가락에 닷는 순간에서부터 고 벙어리 주등이에서 자최를 감추기까지의 하잘 것 없는 짧은 촉각이 좋앗을 뿐이지 그 이상 아모 기쁨도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고 벙어리를 변소에 갓다가 내허버렸다. 그 벙어리 속에는 몇 푼이나 되는지 모르겠으나 고 은화가 꽤 많이 드러있었다.” 이 얼마나 상식의 세계를 떠난 우매냐! 그러나 그는 금전을 사용할 기능을 상실하여버린 것이다. 어느날 밤엔 벙어리 돈을 들고 나가서 그것을 써버리려고 밤새도록 돌아다니다가 소망을 도달치 못하고 그저 돌아왔다. 이 얼마나 돈에 대한 모독이랴! 루소는 돈 가진 사람이 부끄러워서 낯을 붉힐 시대가 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돈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보다는 돈 쓸 줄 모른다는 것이 돈에 대한 몇 배나 심각한 모독이랴!
이리하여 『날개』는 모든 상식과 안일의 생활을 모독하였다. 그것은 현실에 있어서의 패배에 대한 복수가 되는 동시에 그의 날개로 하여금 마음대로 날게 하도록 장애물을 청소하는 준비공작도 될 것이다. 그는 회의와 절망과 피로의 한 주야(晝夜)를 거리에서 방황한 다음 그 자신 위에 기적(奇蹟)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나는 불연 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앗든 자족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지가 닥슈 내리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것든 거름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도다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ㅅ구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ㅅ구나.”
넓은 세계에서 좁고 컴컴한 방밖에는 그의 있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 방도 그의 세계는 아니었다. 그러면 그의 영혼의 고향은 어디냐? 그것은 옛날 그의 날개가 날아보았다는 세계-시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삼월(三越, 미츠코시)옥상에서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 흐늑 허비적거리는 회탁(灰濁)한 세계를 내려다보며 현기를 일으키는 그에게 다시금 날개를 돋쳐서 날아볼 날이 있을까?
우리는 『날개』에서 우리 문단에 드물게 보는 리얼리즘의 심화를 가졌다. 현대의 분열과 모순에 이만큼 고민한 개성도 없거니와 그 고민을 부질없이 영탄치 않고 이만큼 실재화한 예를 보지 못한다. 『천변풍경』이 우리 문학의 리얼리즘을 일보 확대한데 비하여 『날개』는 그것을 일보 심화하였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무엇인가를 한 가지 부족되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높은 예술적 기품이라 할까 하여튼 중대한 한 요소를 가추지 못했다.
그것은 이 작품에 모랄이 없다는 것으로써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작자는 이 사회에 대하여 어느 일정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의 모든 삽화에 나타나는 포즈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편적인 포즈에 불과하고 시종일관한 인생관은 아니다. 상식을 모욕하고 현실을 모독하는 것이 작자의 습관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작자의 윤리관이고 지도원리(指導原理)이고 비평표준이 되느냐하면 나는 선듯 대답하기를 주저한다. 작자는 이 세상을 욕하고 파괴할 줄은 안다. 그러나 그 피안에 그의 독자한 세계는 아직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작품전체의 구성상에 나타난 결함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모든 삽화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수수께끼 모양으로 되어 있다. 작자가 최초의 출발점으로 딛고 나선 패러독스를 이해만 한다면 다음은 대수의 공식을 풀 듯이 우리는 지력만을 가지고도 비교적 용이하게 그 삽화의 수수께끼를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하나하나의 삽화를 연결하는데 그는 인위적인 수단밖에는 가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생활 속으로서부터 우러난 생활자체의 리듬으로써 구성되지 않고 한 장면 장면을 인위적으로 연락(連絡)하였다. 이것이 이 작품에서 예술적 기품과 박진성(迫眞性)을 박탈하는 최대원인일까 한다. 그리고 작품 가운데에 이따금씩 보이는 부자연한 홍소(哄笑)와 불유쾌한 야유도 결국 그것이 작자의 모랄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인위적 동기에서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간주된다. 모랄의 획득은 이 작자의 장래를 좌우할 중대문제일 것이다.